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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보상 피해자들의 휴유증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22-04-18 12:39 조회 : 307회 좋아요 : 3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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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 사건 보상은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의 휴유증

4.3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총살은 기본으로, 무장대는 자신들의 "혁명"에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을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군경은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으며,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육지 출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들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한라산에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이 추위에 못 버텨 하산해 투항하자(일명 '귀순자'들) 격리 수용하다가[31] 한국전쟁의 발발로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하에 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이라는 곳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 제주 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정방폭포나 천지연 폭포 등 제주 폭포 상당수는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 마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남로당 성향을 지닌 부대원 일부에 의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고 경찰과 행정 기관들을 상대로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이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지금에서야 항해, 비행 기술이 발달해 더이상 섬도 단절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한반도와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 수준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한 것이다.

4.3 사건 기간 동안 가족과 지인 등 가까운 주변인들도 쉽게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계속 반복되자, 마을에 남아있으면 누구든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과 억울함에 휩싸여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걸 증명함과 동시에 민간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제주도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국군에 자원 입대했는데,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대가 해병대였기 때문에 자연히 해병대로 입대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 제주도 청년들은 한국전쟁 동안 거제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여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
비슷한 예로, 2차 대전 당시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싸운 것도, "우린 쪽발이가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미국인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미국인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이유로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코사크와 유태인들이 스탈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에 입대하여 용맹히 싸웠고, 현대 러시아의 체첸인들도 보스토크 대대 등에 입대하여 싸우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기간의 후반기 때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소규모로나마 양민학살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일반 주민들이 정보도 얻기 힘들고 워낙 정신 없던 아수라장일 때라서 제주도민을 학살한게 정확히 어느 부대/조직들인지 일일이 알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병대라는 부대에 대해 특별히 반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전의 토벌대가 이미 죽일만한 사람들은 다 죽였기 때문에 해병대가 계엄임무를 맡은 시점에서는 이전과 같이 마구잡이로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 후 제주도에서 해병대 입대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제주도내 예비군 훈련을 해병대에서 담당해왔기 때문에, 현재도 제주도내에서의 해병대에 대해 특별한 반감 정서가 있는건 아니다.
사실 현재의 제주도민들도 구체적으로 어느 부대가 학살을 저질렀는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예를 들어 경찰이 그랬다는 건 많이들 안다고 해서 오늘날의 경찰을 싫어할 리가 없는 것처럼, 해병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해병대도 양민 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해병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해병대측은 제주도 계엄임무 수행시절을 미화해왔고, 2019년에는 예비검속 학살에 책임이 큰 당시 정보참모 김두찬[32]의 이름을 따 김두찬관이라는 건물을 교육훈련단에 개관하여 흑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행히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4.3 사건 후기에서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송악산 기슭의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일어난 학살 등이 있다. 현재 그 희생자들의 무덤이 백조일손지묘란 이름으로 사계리에 조성되어 있다.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 당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 중 가족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에게 전과 기록이 남은 사람은 민주화 이전까지만 해도 연좌제를 적용받아 공무원, ROTC나 부사관, 교사 등 공직에 진출하거나,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과 취직, 승진에 불이익을 받았고, 심지어 해외로 출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본인이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올가미였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제주도민의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어,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워받아 고생한 일이 많았다.
21세기인 지금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시며, 심하면 아예 대화를 끊으실 정도이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걸 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덤덤하게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도에서 이 슬픈 역사 때문에 육지사람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육지 측에서는 제주도 출신을 공산주의자의 자손 취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 제주 4.3 사건 보상은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23-08-17 10:45:15 제주 4.3 사건 법률지원센터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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